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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hind stories of my indian summer

안개나무

2006. 2. 17. 12:45
오후 한시

새벽부터 짙게 덮혀있던 안개는
걷힐 줄 모르고
손톱 세운
검은 나무들을
꼬옥 안아주고 있다

한치 앞도 안보이는 빽빽한 낮안개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내 삶이
많이 닮았다는 어줍잖은 이유로
어쩐지 하루를
응큼하게 비웃으며 보냈다

기가 막힌 인생들과
마른 뼈 같은 나뭇가지들
그리고 이제 만성이 된
내 쓴뿌리같은 한숨들은
늦은겨울색 뽀얀 안개속에 갇혀
내것이 더이상 내것이 아니라는
그 한가지에서 만날 수 있었다


푸르러라

언제 그랬냐는듯
이 짙은 안개 걷힐 때
너희들의 모든 젊음을 다해서

푸르러라

피를 토하며 너의 사랑을 외치며
그 날카롭던 손톱이 무뎌질때까지 땅을 끌어안고
마지막 몸부림을 쳐도 되돌릴 수 없다 하더라도

푸르러라
눈이 시리도록 푸르러라

봄햇살

2006. 2. 13. 12:44

너로부터 봄이 시작된다
10m 상공에서부터 시작한것인양
소리없이, 기척없이 흩뿌려지는 日照

너는 날 몰랐던 것처럼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렇게 무심하게 아스팔트 위에 자작하게 덮힌다

너에게 한마디 건네는 것은
이 겨울이 지나가는 것을
못내 마다하는 내 마음의 절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숨막힐듯 무거운 공기

짓누른다
짓누른다

밑바닥 보도블럭 사이틈에서
예전엔 보이지도 않던
상심 한조각과 비굴 한포기와 미련 한덩어리
이렇게 셋이서 날 환영해준다

빈집

2006. 2. 8. 12:25
하루는 너무 길다고
그분께 고백했다
빈집에 잠시 들어왔던 도둑고양이는
먹을것을 찾지 못해 이내 떠났지만
그뒤로 빈집에겐 긴 하루가 더 길어졌다

광활한 우주 모든 생명체와 비생명체를
하나 하나 주관하시려면 많이 바쁘실거야
미련하게 살아있는 고양이를 사랑해버린
빈집 따위의 고백을
펼쳐볼 시간이나 있으시겠어?

가랑비는 지붕과 벽과 좁은 앞마당을
숨쉴틈도 없이 가득 적셔놓았다
더 부어주셔서
이대로 잠길 수 있게 해주세요

하지만 잠시뿐
빈집은 메마르고 긴 여름날의 하루를
뜨겁게 자신을 태우며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를
고양이를 기다린다

소유

2006. 1. 23. 12:42
습관처럼 눈이 떠진 새벽
긴 겨울밤은
아직도 그 펑퍼짐한 치맛자락을 내려뜨린채
깊은 잠에 빠져있다

큰 상실감과 함께
움직일 수 없도록 사방을 막아버린 길
그 위에서

-가진 것을 세어보아라-

내가 소유하지 못한 것과
내가 빼앗긴 것과
깊숙히 여며두었다고 생각했던
내가 욕심내는 모두를
젖혀두고
내 가진 것을 세어보라하신다

후후후


monday morning 6 20

메마르고 차가운 새벽 바람을 헤치고
긴 계단을 숨차게 올라
하마터면 이르지 못할 뻔 했던
메마르고 차가운 표정을 가진
그 하나에 도착할 수 있었다

2006. 1. 11. 12:41
많은 시간이 있은 후에
꼭 시작처럼 보이는
끝이 도래했다

아직도
계획이나 의도는 없고
그저 기억 하나만을 가지고
하루 하루를 되새기는데

그는
끝이라는
믿을 수 없는 단어로
내 소극적인 자존감을
무너뜨린다

뜨겁지만 연약하여
쉽게 터질 것 같은
심장과

하나와 둘에서
잊지못할
시작들


나는
이제 양쪽 날개죽지가 부러지고
목젖을 잡아뜯긴채
삼천칠백미터 높은 산 정상에 버려진
겨울새처럼

이 끝을 맞이한다

그 곳에서
창조주의
냉정하신 계획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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