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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hind stories of my indian summer

눈 오는 날

2007. 12. 4. 15:16


올 겨울은
오늘 하루만으로도
충분하다
 
이렇게 쌓여가는 계절의 이른 세포들이
비록 전나무는 아니지만
비록 벽난로 있는 산장은 아니지만
엉성한 무대에 올려진 최고의 연극처럼
소복히 얹혀진다
 
 
그날
스무살이라는 나이가
언제까지든 영원할줄 알았던 시절
너른 길에 쌓인 눈 덕분에
달빛도 없이 환하게 밝았던
새벽 두시
 
바알갛게 언 손을 비비며
찾아갔던 그곳
 
그곳엔
하얀 눈이 있었고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던 네가 있었고
그것만으로도 만족했던
아직 하얗던 내가 있었다
 
 
웬일인지
올해 첫눈은
이렇게나 많이 와주었고
털털거리는 차 안에서 창으로 내다보는
눈 많이 덮인 잡목들도
썩 나쁘지 않은 감격을 가져다준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비 오는 날

2007. 11. 21. 00:01


조금 앉아있다가
비가 그치는 걸 확인하고
다시 무거운 허리를 펴고
자리로 돌아왔다
 
늦가을 싸늘한 공기에
튀는 빗방울은 시원하기만 했으나
언제가부터 이걸 즐기고 있는것 같다는
김대리의 나즉한 비아냥이
마흔해가 훌쩍 넘어버린
내 흰머리에 척 달라붙어
왠지 어울린다는 헛웃음이 나온다
 
이런 날 손마디 사이에 있을법한
담배 한가치도 잊은채
이제는 나라는 사람 잊었을지도 모를
희미한 얼굴이
고질병처럼 내 미간을 찌푸리게 한다
 
비가 새어 물든 면회소 벽
비닐테이프로 누렇게 엉겨붙은 창틀 사이로
마지막 인사하러 왔다며
눈물 두어방울 선심쓰듯 보여주며 돌아선 사람
그게 고마워 밤을 새우며 모포 안에서
숨죽이며 흐느끼던 나
 
둘째 아이가 학교에 입학했다는
마지막 소식을 들은지도 어언 십여년
그만큼 저며내고도 아직 남아있는건지
피 섞인 기침은 눈치도 없이 적막을 흐트린다
 
비 속에서
스물두살에 멈춰 있는 그 사람의 얼굴이 보이고
비 속에서
지지리도 못난 인생의 자화상이 젖어 흐른다

새벽 II

2007. 10. 16. 22:51



새벽이 나를 누르면
난 지긋이 눈을 감는다

소박하게 웃던
그대의 흑백사진처럼

새벽은 색도 없이
화사하게 휘감는다

깊게 푸르러 검어진 하늘
저만큼 높이 올라가면
그만큼 더 넓어질까

찬 공기 목에 걸친 채
임피던스 높은 소리가 새어나올까
조심해서 뒤척인다

운명은 아니라고 되뇌이고
우연은 더욱 아니라고 우겨보지만
나는 그대에게
이제나 저제나
아픔을 주는 사람

찬 손 마디 부여잡고
찬 발끝 녹여주고 싶은
이 한 새벽 끝자락에
그대 이름을
나즉이 뿌려본다

아침

2007. 9. 18. 22:49



밤을 아쉽게 내어보내고
맞는 새벽

감기는 눈으로 샤워를 하고 나니
아침이 시작되어버렸네요
 
내가 당신에게 힘이 드나요
내가 당신에게 힘이 되나요
 
자욱한 가을 안개비
물기 머금은 바람을 들이려
창문을 열었어요
 
내가 당신에게 힘이 드나요
내가 당신에게 힘이 되나요
 
보이지도 않게 작았던 물방울들이 모이고
힘에 못이겨 흘러내리듯
내 삶의 선택도 그리 되기를
네 삶의 소망도 그리 되기를
언젠가는 기도의 무게에 이기지 못해
흘러 넘치게 될 날이 오기를 바래요
 
 
새벽은 어머니의 품처럼
내 눈을 감기고
아침은 아버지의 가르침처럼
내 눈을 띄우네요
 
바알간 하늘과 함께 떠오르는
당신, 내 아침에게 나는
힘이 드나요
힘이 되나요


 

2007. 8. 19. 22:47


내가 너에게 들어가는 창
그분이 나에게 들어오는 창
네가 그분께 열어두고 준비하는 창
내가 너를 업고 화사한 얼굴로 새 날을 맞이하는 창
 
쏟아지는 햇살 위로
웃음을 볼 수 있을 때
 
장미빛 해저무는 언덕 아래
후회 한 조각 묻어둘 때
 
미처 피하지 못한 소나기
내 마음까지 적셔 들어올 때
 
그 때 열어둔다 내 창을
그 때 열어다오 네 창을
 
 
내가 너를 위해 닫아두는 창
그분이 나를 위해 닫아두는 창
네가 소박한 얼굴로 그분을 기다리는 창
내가 우연치 않은 욕심 숨기지 못하고 내보이고 만 오늘
끝내 견딜 수 없이 너를 보내는 창
 
그 날에
숨가쁘게 뛰어와 상기된 표정으로 네가 나를 바라볼때
 
그 하루를 위해서
십년을 열어두는 창
그 하루를 위해서
십년을 닫아두는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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