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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hind stories of my indian summer

그날

2018. 7. 2. 18:52

그날은


옆집 아이의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고

앞 사거리에서 장터처럼 떠들던 아저씨들도 다 어딜 갔는지 고요하여

가끔씩 들리는 길냥이 울음소리만 지루한 내 낮잠을 깨울 뿐이었다



그들은


갑자기 나타나 내 생각은 묻지도 않고 사람 많은 언덕길로 나를 끌고 갔고

안그래도 울퉁불퉁한 돌길은 사람들이 집어 던진 나뭇가지와 옷으로 뒤덮여 한 걸음 내딛기도 어려울 판이었다

설마 어린 내 잔등에 누굴 태우겠어 라고 생각한 건 나의 오판이었다



그분은


힘들고 시끄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툴툴거리는 내게, 갈기도 아직 듬성듬성한 내 목을 어루만지며 나즈막히 속삭이셨다

"네가 복이 있구나"



이제 그날은


따분하고 의미없던 이 마을에

막혔던 분수가 터져나오듯 시원한 물줄기가

그 분이 올라탄 내 등으로부터 시작해 길가에서 소리 지르는 사람들에게까지, 아니 저 멀리 보이는 예루살렘 성전까지도 뻗어나가는 그런 날이 되었다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디에서부터인지도 모르겠지만, 아무 짝에도 쓸모 없다고 생각했던 내 안에는 환한 것으로 가득하게 되었고, 그 분이 내게 하신 단 한마디는 오랫동안 내 귀에 울리고 있었다



아저씨

2011. 1. 5. 17:33

언니,
그 아저씨는 내가 누굴 미워하느냐고 물었어
.
그래서 생각해보았지.
.... 

한참을 그렇게 미운 얼굴들, 미운 이름들을 나열하다 보니 한 가지 느껴지는 게 있더라구
.
내가 미워하는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어.
모두 적어도 한가지씩은 나보다 나은 점이 있던 거지
.
나보다 예쁘거나,
돈 많은 남자친구가 있거나,
성격이 좋거나,
아님 최소한 나보다
1cm 키라도 컸던 거야
.
머리 속에 떠오른 그 사람들의 얼굴 때문에 찌푸려진 내 인상이 펴지기도 전에 그 아저씨가 나더러
,
그 사람들의 발을 씻겨줄 수 있겠냐고 묻는 거 있지
?
....
언닌 그럴 수 있어? 얼굴만 봐도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오르는데 그 사람들의 더러운 발을 내 손으로 씻겨주라구?
....
근데 언니, 그 아저씨가 그러는데
..
그게 이기는 거래
.
그게 내가 무의식 중에 가지고 있던 열등감을 이기고
,
나를 꼼짝 못하게 묶고 있던 증오의 매듭들을 풀 수 있는 방법이래
.
그게 그 꼴 보기 싫은 얼굴들을 내 기억 속에서 지우고,
내 삶에서 내가 나에게 이기는 유일한 길이라는 거야
.
....
내가 심란한 표정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으니까,
그 아저씨는 왠지 내 마음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희미한 미소와 안쓰러운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어.
만약 다른 사람이 그렇게 날 쳐다보았으면 난 기분 나빠서 한마디 쏘아붙여주었을텐데,
그 아저씨의 얼굴에는 진심으로 날 걱정하는 마음이 깃들어 있다는게 느껴지는거 있지?
....
언니,
내가 그럴 수 있을까?
내가 미운 사람들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보면서
그들의 발을 씻겨주고
그.. 용서라는 걸 할 수 있을까?

사랑

2009. 3. 4. 16:39



불혹이 되어
이제서야 깨달은 사랑

뛰면 넘어질까
먹으면 체할까
울면 마음 상할까
웃으면 교만할까
매일처럼 조바심내며 나를 돌보시는
그 짜릿한 사랑

아무것도 붙들 것 없이
사막 가운데 혼자 남게 되어도
숨쉴 수 없이 좁디 좁은
독방에 혼자 갇히게 되어도
망망한 바다 한 가운데
끝없이 가라앉고 있어도
그가 옳다고 하면 옳은줄로 여기고
그가 약속한 것을 잠잠히 기다릴 때
불현듯이 밀려드는 그 사랑

한치의 오차도 없이
연인을 위한 이벤트처럼
예상치 못한 길로 오시는 사랑

파도처럼 소나기처럼
혹은 미풍처럼 가을비처럼
메마를 뻔 했던 눈물과
굳어져가던 미간을 미소로 되돌려 주신
세밀한 사랑



내 진정 사모하는 친구가 되시는 구주 예수님은 아름다와라
산 밑에 백합화요 빛나는 새벽별 주님 형언할 길 아주 없도다
내 맘이 아플 적에 큰 위로 되시며 나 외로울 때 좋은 친구라
주는 저 산 밑에 백합 빛나는 새벽별 이 땅 위에 비길 것이 없도다

내 몸의 모든 염려 이 세상 고락 간 나와 항상 같이 하여주시고
시험을 당할 때에 악마의 계교를 즉시 물리치사 날 지키시네
온 세상 날 버려도 주 예수 안 버려 끝까지 나를 돌아보시니
주는 저 산 밑에 백합 빛나는 새벽별 이 땅 위에 비길 것이 없도다

내 맘을 다하여서 주님을 따르면 길이 길이 나를 사랑하리니
물불이 두렵지 않고 창검이 겁없네 주는 높은 산성 내 방패시라
내 영혼 먹이시는 그 은혜 누리고 나 친히 주를 뵙기 원하네
주는 저 산 밑에 백합 빛나는 새벽별 이 땅 위에 비길 것이 없도다

파도

2008. 3. 7. 15:21



하나를 넘으면 또 한녀석이 기다리고 있다

나침반도 없이
흔한 노 하나 챙기지 못한채
두번째 출발점에서
후회할 틈도 없이
선택할 여지도 없이
시작해버린 삶이지만
 
이 지긋지긋한 멀미와 뙤약볕은
내 흐린 기억을 절개하고
그 틈 사이에 재를 뿌리고
그나마 남아있던 오기조차
뿌리내리지 못하도록 만든다
 
혼자는 아니다
둘러보면 똑같은 표정들을 해가지고는
물밑에 비추이는 자기 얼굴에 대고
구역질을 해대는
흔한 인생들이 쌔고 쌨다

하지만 그게 위로가 될리 없고
짠물과 그을린 등허리
그것이 내게 남은 것이라며
또 한번 세차게 밀어붙이며
자존심 버리고 꽉 붙들라 한다

음악

2007. 12. 10. 15:18


내게 있어서 음악이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방과도 같다
그 안에는 전지자께서 미리 만들어 놓으신
수만개의 조각들이 있다
 
그가 부르실때
혹은 내 필요에 의해서
나는 그 방문을 열고 들어간다
그리고 조각들 중 하나를 만지기 시작한다
 
어떤 때에는 그가 계획하셨던
혹은 내가 생각했던 조각이 맞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비슷한 모양의 조각
아니, 심지어는 전혀 예상과 다른
엉뚱한 조각을 만지고 있기도 하다
그럴 때에는 그 조각에서 손을 떼고
얼른 다른 조각으로 옮겨간다
 
방에서 나오면
그 조각을 만졌던 기억을 더듬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 잠깐 사이에 나는
그 모양을 잊을 때도 있고
어쩌면 내가 원하는 살을 붙이기도 한다
 
이렇게 전혀 창조가 아닌
그가 만들어두신 수만개 중 하나를
그저 베끼는 일도
쉬운 일만은 아니다
 
내가 만졌던 조각들의 기억의 잔재도 남아있고
다른 사람들이 그린 그림을 본 기억도 역시 남아있는 가운데
내게 허락하신 그 조각의
고유한 정체성을 나타내는 과정은
내게 남겨주셨다
 
장르는 무의미하다
그 안에는 클래식도 있고 재즈도 있고
찬양곡도 있고 하드록도 있다
 
자,
이렇게 하나의 음악이 완성된다
이제 어떻게 하면 그 깜깜한 방 안에서
옳은 조각을 찾느냐
그리고 그 조각을 만졌던 기억을 잊지 않고
옳은 그림을 그리느냐
두가지가 관건이다
 
이 두가지를 잘하기 위해서
내게 필요한 것은
사랑과 이별
침묵과 인내
그리고
기도이다
아주 가끔은 학습과 연습이 필요하기도 하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창작이라고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영감이라고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자연의 소리를 듣는거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학습의 결과라고도 한다
 
내게 있어서 음악은
전지자가 애써 만들어놓으신 조각의 그림을
결국은 100% 똑같이 베껴내지 못하는
실패작들의 연속일뿐이다
하지만 그분은 실망하지 않으시며
오늘 또 오늘에 어울리는 하나의 조각을 건네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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